2014/12/17

우관중(吴冠中, 1919-2010), 중국근대회화의 창시자



오늘날 중국근대회화사에서 우관중(1919-2010)은 근대중국화의 창시자로 일컬어진다. 

우관중은 1919년 장수성의 농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그가 아버지처럼 교사가 되기를 원했다. 그래서 1935년 우관중은 절강공립공업학교에 입학하여 전기학을 공부하게 된다. 

하지만 재학중에 우관중은 오늘날 또다른 거장인 주데춘을 우연히 만나게 된다. 당시에 항저우 미술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던 주데춘은 우관중에게 항저우 미술대학을 방문하게 하였는데, 여기에서 우관중은 처음으로 미술이라는 것을 보게 된다. 

이후 우관중은 미술에 거의 광적으로 매료되게 되고, 결국 부친을 뜻을 저버리고, 1936년에 항저우 미술학교로 전학을 해서 중국화와 서양화를 공부하게 된다. 

하지만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났고, 학교는 일본군의 침입을 피하기 위해 짐을 꾸려 옮겨야 했다. 덕분에 우관중은 중국의 많은 지역들을 볼 수 있게 된다. 우관중은 이때의 여정을 자신의 인생을 형성하기 위한 필요한 것이었다고 회상한다. 

1942년 항저우 국립미술학교를 졸업한 우관중은 직업을 얻고자 하였다. 하지만 전쟁기간에 직장을 찾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였다. 요행히도 그는 총칭대학 건축과에서 수채화와 드로잉을 가르치는 선생으로 일하게 된다. 

졸업이후에도, 우관중은 자신의 기량을 다듬어 나갔고, 주데춘, 리린찬, 정웨이 등 학교동창들과 함께 활동을 계속하였다. 이들 모두는 서로를 격려하며 화업을 계속하였다. 

1946년 우관중은 정부가 실시하는 해외유학을 지원하게 되고, 여기에서 최고 장학생으로 선발되었다. 1947년 우관중은 정부장학금으로 파리에 가서 공부하게 된다. 

우관중은 파리의 미술에 엄청난 충격을 받게 된다. 그는 파리에 도착이후 며칠동안을 파리의 주요미술관을 돌아다녔다. 유럽에 체류하면서, 우관중은 유럽과 중국의 많은 차이점들을 발견하게 된다. 

우관중은 유럽의 전통미술을 공부하면서도 프랑스의 근대미술에 더 큰 흥미를 가졌다. 특히 반고흐, 폴 고갱, 세잔느 등 후기 인상주의 화풍에 크게 매료되었다. 그중 특히 우관중은 반고흐를 좋아했는데, 왜냐하면 반고흐의 예술에 대한 열정에 크게 감화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들 후기인상주의자들은 우관중으로하여금 미술의 형식과 기본 의미에 대해 자각하게 하였다. 

우관중은 1950년 여름 중국으로 귀국한다. 

중국은 이미 새로운 인민공화국으로 바뀌어 있었다. 중국공산당 정부는 귀국한 모든 유학생들에게 직업을 알선해 주었다. 우관중은 베이징의 중앙아카데미에서 1950년부터 53년까지 서양미술을 학생들에게 가르치게 된다. 

우관중은 프랑스에서 유학한 최초의 중국화가라는 점에서 그리고 프랑스의 모더니즘에 대한 이론과 실천에 있어서 탁월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게 된다. 하지만 이 때문에 그의 동료들은 그를 질투하였다. 중앙아카데미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화풍이 지배하게 되었고, 우관중은 부르주아 형식주의자로 몰리게 되었다. 

우관중은 더 이상 중앙 아카데미에 머물기 곤란해졌고, 결국 그만두고, 이후 1953년에서 64년까지 오늘날 칭화대학교에 해당하는 베이징미술보통대학에서 교편을 잡는다. 

교수로서 우관중은 중국의 여러 곳을 여행하였으며, 중국의 웅장함을 느끼게 된다. 

베이징미술보통대학에서 우관중의 인생은 그가 바라던 데로 대부분 이루어졌다. 왜냐하면 그는 직장 동료와 대부분 뜻이 맞았고, 학생들은 그를 잘 따랐으며, 또한 작업에도 열심히 정진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시기에도 우관중은 여러 지방을 여행한 이후 풍경화에 전념하게 된다. 

이후 우관중은 1964년에 베이징의 중앙미술공예연구소의 교수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하지만 이후에 중국전역에 걸친 마오쩌동의 문화혁명은 그에게 또다른 불행을 가져다 주었다. 

1966년 우관중은 창작과 미술에 관한 집필을 금지당하게 되었으며, 그의 초기작품들은 1970년에 대부분 파괴되게 된다. 공산당의 재교육 프로그램에 의해 그와 그의 아내는 떨어져서 시골에서 3년간의 중노동에 동원되어야 했다. 

3년이 지나자 우관중에게는 겨우 일요일 혹은 공휴일에만 그림그리는 것이 허용되었고, 그 나머지는 들판으로 가서 일을 하도록 강제되었다.

이 당시 많은 화가들이 박해를 받고 있고, 심지어는 죽임을 당한다는 소문이 공공연히 퍼지게 되었다. 우관중은 자신의 누드그림들을 태워버려야 한다는 가슴아픈 결정을 하게 된다.  왜냐하면 누드그림은 공산당에 의해 비판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드그림을 소각한 이후 우관중은 신체적 박해는 피할 수 있었지만, 이는 두고두고 우관중에게는 아쉬운 일로 남았다. 

1972년 우관중은 베이징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고, 여러 호텔의 벽화를 그리게 된다. 베이징으로 돌아오기 전에 우관중은 서구풍의 유화 혹은 수채화를 그렸지만, 대부분의 작가들은 여전히 전통 중국풍으로 수채화를 그리고 있었다. 

여전히 중국 내부나 외부에서 사람들은 그림 하면 중국 전통의 먹그림을 염두에 두었다. 1975년 일본의 중국미술협회에서는 우관중에게 전시초청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 협회는 우관중에게 전통중국의 먹그림을 보여주기를 바랬다. 결국 우관중은 유럽적 재료를 포기하고 중국의 전통적 재료로 그림을 그리게 된다. 그럼에도 그의 전시는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1979년 우관중은 자신의 첫번째 개인전을 열었다. 이후 1980년부터 우관중은 화가로서 확고부동안 자리매김을 하게 된다. 이후 10회 이상의 개인전을 가졌으며, 1991년에는 프랑스문화성으로부터 문예훈장도 받게 된다.

2010년 6월 25일 밤에 우관중은 90세의 나이로 베이징에서 일생을 마감하게 된다.

2014년 KIAF: 겨울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는가?

<KIAF 전경>

금요일의 KIAF는 사람들로 북적거리지는 않았다. 오히려 조용하였다. 전시된 많은 작품들을 쾌적하게 감상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하지만 대부분의 화랑주들은 안절부절이었다. 그들은 황금의 토요일과 일요일이 오면, 그들의 적자가 상쇄될 것이라고 애써 스스로를 위안하고 있었다.

많은 화랑주들은 KIAF가 작년보다도 더 나쁘다고 말하였다. 구매자들이 극히 적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단순 방문객들도 작년 보다 훨씬 못하다고 하였다.

KIAF에 충실히 참가하여온 많은 갤러리들은 여러 해 동안 행복하지 못했다. 서울의 미술시장은 오랫동안 약세이어 왔다. 많은 미술과 연관된 악재들 (미술품 거래를 통한 재벌들의 세금포탈, 6천만원 이상의 미술작품 거래에 새로운 양도세의 도입, 일부 대표작가들 작품에 대한 위작 논쟁, 등)은 대중들로 하여금 미술시장을 바라보는데 회의적인 시각을 갖게 했다.

매수가 강하지 않기 때문에 많은 갤러리들이 해마다 참가를 포기하여 왔다. 그렇다 하더라도, KIAF는 늘 많은 신생 갤러리들로 북적거려 왔다. 왜냐하면 이들 신생갤러리들은 KIAF가 한국의 대표적인 아트페어라고 생각하여 왔기 때문이다. 지방에 있는 많은 갤러리들은 KIAF의 무대에 발을 디뎌보는 것이 소원이다. 그들은 마치 시험을 합격한 것처럼 자부감을 갖게 된다.

최근 미술계에 도는 소문이 있는데, 그것은 한 외국 아트페어 회사가 서울에 새로운 아트페어 론칭을 모색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소문 때문에, 서울의 많은 화랑들과 미술 에이전시들은 이제 경계모드로 돌입했다. 만일 이 소문이 사실이라면, 서울의 미술시장은 어찌됐든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할까?

애니갤러리 2014년 볼료냐 아르테피에라 참가

애니갤러리가 2014년 1월에 이태리 볼료냐에서 열리는 세계적인 아트페어 아르테 피에라에 전시 초대를 받았습니다.

볼료나 아르테 피에라는 이태리 최고의 아트페어이면서, 가장 역사적이고 아방가르드적인 갤러리들을 소개하므로서 세계적인 국제아트페어로 명성을 높혀왔습니다.

국제미술계에서 볼료냐 아르테피에라는 20세기에서 현대까지의 세계적으로 유명한 이탈리아 작가들을 소개하여 왔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카를로 카라, 펠리체 카소라티, 조르지오 데 키리코, 지노 세베리니 등 20세기 초기의 작가 뿐만 아니라, 엔리코 카스텔라니, 아고스티노 보나루미, 빈첸조 아녜티와 같은 개념미술가들이 아르테 피에라에서 소개되었습니다.


<2014년 아르테피에라 현장>

또한 유럽의 앙포르멜이 주류를 이루었던 시절에 기우세퍼 카포그로시, 알베르토 부리, 에밀리오 베도바, 혹은 루치오 폰타나 등 비정형예술가들 역시 아르테 피에라에서 소개된 바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현대에 와서 지오바니 안젤모, 알리키에로 보에티, 피에로 파울로 칼조라리, 기우세퍼 페노네, 미켈란젤로 피스톨레토, 질베르토 조리오 등의 아르테포베라 계열의 작가들이 아르테 피에라에서 선을 보였었습니다.

그 밖에 이태리 트란스아방가르드 계열의 작가들 역시 아르테 피에라에서 두각을 나타내었습니다.

한 마디로 아르테 피에라는 현대 이태리 미술의 대표적인 작가들을 배출시킨 세계적인 아트페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아트페어는 이탈리아의 대표적 작가들만 소개해 온 것은 아닙니다. 

안토니 곰리, 와임 델보예(Wym Delvoye), 페 바클리, 토니 아우슬러, 한스 페터 펠드만, 알프레도 자 등이 소개되었는가 하면, 데이비드 호크니, 길버트 앤 조지, 토니 크래그 등 영국미술의 가장 대표적 주자들 역시 아르테 피에라에서 소개된 바 있으며, 또한 토마스 루프, 안톤 코빈, 루이지 기리 등과 같은 사진예술의 대가들도 이 전시에서 선을 보여 왔습니다. 그 외에도 미국의 퍼포먼스 작가 닉 케이브, 러시아의 페터 벨리의 설치미술, 그리고 중국의 장 후안 등도 아르테 피에라와 인연을 맺어 왔었습니다.

애니갤러리는 이들 세계적인 거장들의 작품세계와는 달리,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전통에 기반을 둔 작품들을 재해석한 큐레이팅으로 아르테 피에라 측으로부터 극찬을 받고 당당히 이 세계적인 무대에 입성을 하게 되었습니다.

애니갤러리의 전시컨셉은 서양미술에서의 형식과 재료의 문제, 특히 리오넬로 벤추리가 지적했던 미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형식에 관한 관점과, 페르시아 인들의 재료에 관한 관점의 차이처럼, 아시아에서도 먹과 채색과 관련한 미의 컨셉이 존재하였음을 주장한 바 있습니다.

애니갤러리는 이들 먹과 채색의 흐름에 수반되는 컨셉을 명료히 하므로서 아시아에서도 역시 유럽과 마찬가지로 미의 컨셉이 변증법적 진화를 하여온 점을 부각시켰으며, 이 점이 아르테 피에라 측으로부터 참신한 해석으로 인정을 받고, 당당히 세계적인 갤러리들과 함께 전시를 하는 무대에 서게 된 것입니다.

애니갤러리는 오늘날 아시아의 대부분 갤러리들이 제시하는 서구화된 컨셉의 작가들을 발굴하기 보다는, 오히려 아시아의 전통을 이어가는 작가들에게서 새로움을 발견하고 이를 재해석하여 아시아와 유럽, 미국 등에 소개하는 작업을 하여 왔습니다.

이러한 작업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어서, 서양철학과 미술사는 물론이고, 동양 특히 한국과 중국의 철학과 미술사에 대한 변증법적 인식을 토대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영어, 불어, 독일어, 이태리어 등 유럽언어 뿐만 아니라 중국어 등 여러 어학을 소화하고, 여러 원전을 접근해야 하는 과정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이는 누구나 쉽게 얘기할 수는 있겠지만, 실제 이러한 작업을 완성시키는 일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입니다.

이 어찌보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작업을 위해 애니갤러리는 상업갤러리임에도 불구하고 업무의 거의 80% 이상을 돈을 버는 일 보다는 오히려 연구와 개발에 투자하여 왔습니다.

볼료나의 아르테 피에라는 오는 2014년 1월 24일부터 27일까지 볼료냐의 콰르티에레 피에리스티코에서 열리며, 애니갤러리는 26 Hall의 부스 B28에서 전시하게 됩니다.

애니갤러리 2014년 11월 AAF 싱가포르 아트페어 참가

<AAF 싱가포르 아트페어>


해마다 싱가포르의 AAF 아트페어에 참가하여온 애니갤러리가 금년도 11월에도 역시 AAF 아트페어에 참가하게 된다.

이미 지난 6월 중순 경 일찌감치 전시승인을 얻은 애니갤러리는 금년도에는 더욱더 중견작가 쪽으로 포트폴리오를 가다듬고 있다.

이미 싱가포르에서 인기작가의 자리를 굳힌 박상덕, 전미선 작가, 그리고 지난 3월에 홍콩 AAF에서 크게 두각을 나타낸 나윤찬 작가 뿐만 그 외에도 더많은 중견작가들을 싱가포르 미술시장에 선보일 예정이다. 그 중 특히 한국화에서 상당한 입지를 굳힌 하철경 작가, 박영대 작가 등도 금년도에는 소개된다.

하철경 작가는 이미 미협이사장을 역임하였을 뿐만 아니라, 현재 한국예총회장 직을 맡고 있으며, 작가로서, 교수로서 그리고 예총회장으로서 미술계에서 신망이 두터운 작가이다. 박영대 작가는 지난 90년대 중반 영국의 대영박물관에 작품이 소장된 것으로 유명하며, 특히 한일전 등을 통해 일본 미술계에 많이 알려져 있는 중견작가이다.

또한 이미 국내화단에 많이 알려져 있는 프랑스 작가 다비드 예가네(David Yeghaneh)도 애니갤러리에 합류하기로 하였다.

이 외에도, 이번 싱가폴 AAF 아트페어에서 애니갤러리는 강정옥, 김성욱, 김순이, 변선영, 송혜란, 신영은, 윤석범, 음영일, 최혜자, 홍성모 작가 등을 새롭게 소개할 예정으로 있다.

비엔날레와 비평의 관계는 물과 물고기의 관계만큼 긴밀


<카셀도큐멘타>


미술 비엔날레가 잘 되려면 비엔날레 예산만 증액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우선 비엔날레는 그 목표가 상업적 수익이 아니고 매우 추상적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모호하다.

이 모호함을 그래도 비교적 뚜렷한 의미로 각색해 주는 것은 외부의 비평가들이다. 하지만 비평가들은 대중들의 지지기반이 있어야만 자연스레 존재할 수 있다. 이래서 비엔날레가 인위적으로 외부 비평가의 비평을 각색해도 잘 안되는 것은 그 비평이 대중의 지지기반이 결여되었기 때문이다.

비엔날레가 물고기라면, 외부비평가들은 플랑크톤이고, 대중들은 거대한 바다라고 할 수 있다. 플랑크톤은 거대한 바다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고, 물고기는 플랑크톤 없이 존재할 수 없다.

그런데 이 조건이 완벽하게 갖춰진 비엔날레가 바로 베니스비엔날레이다. 베니스비엔날레가 열리면 수많은 비평가 집단이 움직인다. 적지않은 세계 곳곳의 대중집단들이 이들의 비평을 보고 즐거워 한다.

베니스비엔날레를 제외하고, 많은 변방의 비엔날레들이 실패하는 이유는 바로 이 대중적 지지기반을 가진 비평가 집단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먼저 비엔날레를 만들고 나면 어떻게 되겠지 하는 기대를 갖지만 현실은 그리 녹녹지 않다. 비엔날레의 인프라는 그리 쉽게 형성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좀더 영악한 사업가라면, 비엔날레를 만들기 전에 바로 이 인프라를 탐색할 것이다. 그래야 예산을 좀더 효율적으로 쓸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비엔날레의 토양이 발전하려면 비평의 문화가 육성되어야 하며, 비평의 문화가 육성되려면 비평가들이 대중의 기반을 갖고 있어야 한다.

비엔날레가 좀 잘될려면 비평가들에게도 돈을 좀 써야 한다. 많은 비엔날레들이 매스미디어에는 엄청난 예산을 퍼부으면서도 이 비평가 집단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도 불찰이다. 물론 대중적 지지기반의 비평가를 찾는 것도 쉽지는 않았겠지만....

아트페어는 그 목표가 상업적 매출증대에 있기 때문에 비평가 집단을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바젤아트페어는 좀 다르다.

사실상 바젤아트페어는 거의가 비엔날레와 유사하다. 바젤아트페어가 열리면 수많은 비평가 집단의 글들이 매스미디어에 등장한다. 그들의 행간을 가만히 읽고 있노라면, 대부분 바젤아트페어 찬양 일색이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젤이 이들 비평가 집단에 인색했다면 과연 이런 글들은 스스로 우러나와서 바젤을 칭찬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을까?

'서독으로 간 에트랑제, 이응노', 6.14-9.21, 이응노미술관

<프랑크푸르트 메인강가 2월 15일 아들 이융세와 함께>


이응노 미술관은 6월 14일부터 9월 21일까지 1959년 독일 여행 당시의 이응노 화백의 전시와 관련한 아카이브를 기획했다.

<콜라주, 1962, 캔버스 위에 종이 콜라주, 77x64>


이 전시는 1959년 이응노 화백이 독일을 순회(프랑크푸르트, 쾰른, 본)하면서 전시했던 자취와 관련한 작품과 자료를 조명한다. 그리고 50년대와 60년대의 유렵미술의 흐름과 관련하여 이응노 화백의 예술세계를 탐구해 보고자 하고 있다.


<풍경,1950, 한지에 수묵담채, 133x68>


이 기획전은 또한 당시 이응노 화백이 최초로 유럽미술로서 접했던 카셀도큐멘타가 작가의 작품세계에 끼친 영향관계도 주목하고 있다.


<본(Bonn) 전시 사진>


    ○ 전시명: 서독으로 간 에트랑제, 이응노 



    ○ 기  간: 6월 14일 - 9월 21일 



    ○ 장  소: 이응노미술관 1-4실 



    ○ 오프닝: 2014년 6월 14일 10:00 a.m. / 미술관 로비



<당시 서독의 기사 Neue Presse, 1959. 2. 19>

2014/12/16

다비드 예가네 (David Yeghaneh): 돌아온 화가의 끼

<다비드 예가네>

다비드 예가네는 다른 세계에서 미술계로 자리를 잡는데 성공한 드문 작가들 중 한 사람이다. 이전에 그는 정치학 박사로 영국, 스위스 그리고 일본 등 여러 나라에서 일하여 왔다. 그가 서울에 왔을 때 그는 무언가 알 수 없는 서울의 분위기에 매료되었었다. 그는 서울에 정착하기로 마음 먹었고, 화가로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었다.

서울의 새로운 처소로 옮긴 후, 그는 많은 추상작품들을 완성하고, 이 작품들을 몇몇 갤러리에 보여 주었다. 그러는 가운데, 인사동 제이갤러리의 관장이 그의 그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2011년 9월에 다비드는 제이갤러리에서 첫번째 개인전을 갖게 되었다. 미술계에서 그는 완전히 무명작가나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첫번째 전시를 어쨋든 성공적이게끔 했다. 그의 한국인 부인이 옛 친구들을 전시에 불러서 그를 도와 주었다.

그 이후, 많은 갤러리 관장들이 그의 그림에 더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자미갤러리, 아트피플 갤러리, 평창동 갤러리, 송은갤러리 등 많은 갤러리에서 그는 초대전을 갖게 된다. 그 뿐만 아니라 멀리 미국 아틀란타에 있는 베샤라 갤러리에도 초대를 받아 전시를 하게 된다. 

갤러리 전시 이외에도 그는 여러 아트페어에 초대를 받아 전시를 하게 된다. 아시아 아트페어, 대구아트페어, 아시아 톱갤러리 호텔 아트페어, 부산국제아트페어, 그리고 서울오픈아트페어 등에 그는 종종 자신의 작품을 선보이게 되었다.

서울오픈아트페어에서의 그의 최근 전시는 서울 미술시장의 침체에도 불구하고 경이적인 성공을 기록하였다.

사실 금년도의 아트페어는 최악의 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마지막날까지 그림 한 점 팔지 못한 갤러리들도 많았다. 

그러한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다비드의 부스는 늘 붐비었고, 벽 전체를  빨간 딱지로 도배하다시피 거의 모든 작품을 판매하게 되었다. 그는 아트페어에서 단연 두각을 나타내었고, 미술시장의 새로운 스타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다비드 예가네는 어느 갤러리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으며, 앞으로도 자유로운 작가로 남을 예정이다. 왜냐하면 그는 어떤 것에도 구속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독립적이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은 예술가로서 그의 절대적 선택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