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셀도큐멘타>
미술 비엔날레가 잘 되려면 비엔날레 예산만 증액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우선 비엔날레는 그 목표가 상업적 수익이 아니고 매우 추상적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모호하다.
이 모호함을 그래도 비교적 뚜렷한 의미로 각색해 주는 것은 외부의 비평가들이다. 하지만 비평가들은 대중들의 지지기반이 있어야만 자연스레 존재할 수 있다. 이래서 비엔날레가 인위적으로 외부 비평가의 비평을 각색해도 잘 안되는 것은 그 비평이 대중의 지지기반이 결여되었기 때문이다.
비엔날레가 물고기라면, 외부비평가들은 플랑크톤이고, 대중들은 거대한 바다라고 할 수 있다. 플랑크톤은 거대한 바다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고, 물고기는 플랑크톤 없이 존재할 수 없다.
그런데 이 조건이 완벽하게 갖춰진 비엔날레가 바로 베니스비엔날레이다. 베니스비엔날레가 열리면 수많은 비평가 집단이 움직인다. 적지않은 세계 곳곳의 대중집단들이 이들의 비평을 보고 즐거워 한다.
베니스비엔날레를 제외하고, 많은 변방의 비엔날레들이 실패하는 이유는 바로 이 대중적 지지기반을 가진 비평가 집단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먼저 비엔날레를 만들고 나면 어떻게 되겠지 하는 기대를 갖지만 현실은 그리 녹녹지 않다. 비엔날레의 인프라는 그리 쉽게 형성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좀더 영악한 사업가라면, 비엔날레를 만들기 전에 바로 이 인프라를 탐색할 것이다. 그래야 예산을 좀더 효율적으로 쓸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비엔날레의 토양이 발전하려면 비평의 문화가 육성되어야 하며, 비평의 문화가 육성되려면 비평가들이 대중의 기반을 갖고 있어야 한다.
비엔날레가 좀 잘될려면 비평가들에게도 돈을 좀 써야 한다. 많은 비엔날레들이 매스미디어에는 엄청난 예산을 퍼부으면서도 이 비평가 집단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도 불찰이다. 물론 대중적 지지기반의 비평가를 찾는 것도 쉽지는 않았겠지만....
아트페어는 그 목표가 상업적 매출증대에 있기 때문에 비평가 집단을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바젤아트페어는 좀 다르다.
사실상 바젤아트페어는 거의가 비엔날레와 유사하다. 바젤아트페어가 열리면 수많은 비평가 집단의 글들이 매스미디어에 등장한다. 그들의 행간을 가만히 읽고 있노라면, 대부분 바젤아트페어 찬양 일색이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젤이 이들 비평가 집단에 인색했다면 과연 이런 글들은 스스로 우러나와서 바젤을 칭찬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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