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관중은 1919년 장수성의 농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그가 아버지처럼 교사가 되기를 원했다. 그래서 1935년 우관중은 절강공립공업학교에 입학하여 전기학을 공부하게 된다.
하지만 재학중에 우관중은 오늘날 또다른 거장인 주데춘을 우연히 만나게 된다. 당시에 항저우 미술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던 주데춘은 우관중에게 항저우 미술대학을 방문하게 하였는데, 여기에서 우관중은 처음으로 미술이라는 것을 보게 된다.
이후 우관중은 미술에 거의 광적으로 매료되게 되고, 결국 부친을 뜻을 저버리고, 1936년에 항저우 미술학교로 전학을 해서 중국화와 서양화를 공부하게 된다.
하지만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났고, 학교는 일본군의 침입을 피하기 위해 짐을 꾸려 옮겨야 했다. 덕분에 우관중은 중국의 많은 지역들을 볼 수 있게 된다. 우관중은 이때의 여정을 자신의 인생을 형성하기 위한 필요한 것이었다고 회상한다.
1942년 항저우 국립미술학교를 졸업한 우관중은 직업을 얻고자 하였다. 하지만 전쟁기간에 직장을 찾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였다. 요행히도 그는 총칭대학 건축과에서 수채화와 드로잉을 가르치는 선생으로 일하게 된다.
졸업이후에도, 우관중은 자신의 기량을 다듬어 나갔고, 주데춘, 리린찬, 정웨이 등 학교동창들과 함께 활동을 계속하였다. 이들 모두는 서로를 격려하며 화업을 계속하였다.
1946년 우관중은 정부가 실시하는 해외유학을 지원하게 되고, 여기에서 최고 장학생으로 선발되었다. 1947년 우관중은 정부장학금으로 파리에 가서 공부하게 된다.
우관중은 파리의 미술에 엄청난 충격을 받게 된다. 그는 파리에 도착이후 며칠동안을 파리의 주요미술관을 돌아다녔다. 유럽에 체류하면서, 우관중은 유럽과 중국의 많은 차이점들을 발견하게 된다.
우관중은 유럽의 전통미술을 공부하면서도 프랑스의 근대미술에 더 큰 흥미를 가졌다. 특히 반고흐, 폴 고갱, 세잔느 등 후기 인상주의 화풍에 크게 매료되었다. 그중 특히 우관중은 반고흐를 좋아했는데, 왜냐하면 반고흐의 예술에 대한 열정에 크게 감화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들 후기인상주의자들은 우관중으로하여금 미술의 형식과 기본 의미에 대해 자각하게 하였다.
우관중은 1950년 여름 중국으로 귀국한다.
중국은 이미 새로운 인민공화국으로 바뀌어 있었다. 중국공산당 정부는 귀국한 모든 유학생들에게 직업을 알선해 주었다. 우관중은 베이징의 중앙아카데미에서 1950년부터 53년까지 서양미술을 학생들에게 가르치게 된다.
우관중은 프랑스에서 유학한 최초의 중국화가라는 점에서 그리고 프랑스의 모더니즘에 대한 이론과 실천에 있어서 탁월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게 된다. 하지만 이 때문에 그의 동료들은 그를 질투하였다. 중앙아카데미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화풍이 지배하게 되었고, 우관중은 부르주아 형식주의자로 몰리게 되었다.
우관중은 더 이상 중앙 아카데미에 머물기 곤란해졌고, 결국 그만두고, 이후 1953년에서 64년까지 오늘날 칭화대학교에 해당하는 베이징미술보통대학에서 교편을 잡는다.
교수로서 우관중은 중국의 여러 곳을 여행하였으며, 중국의 웅장함을 느끼게 된다.
베이징미술보통대학에서 우관중의 인생은 그가 바라던 데로 대부분 이루어졌다. 왜냐하면 그는 직장 동료와 대부분 뜻이 맞았고, 학생들은 그를 잘 따랐으며, 또한 작업에도 열심히 정진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시기에도 우관중은 여러 지방을 여행한 이후 풍경화에 전념하게 된다.
이후 우관중은 1964년에 베이징의 중앙미술공예연구소의 교수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하지만 이후에 중국전역에 걸친 마오쩌동의 문화혁명은 그에게 또다른 불행을 가져다 주었다.
1966년 우관중은 창작과 미술에 관한 집필을 금지당하게 되었으며, 그의 초기작품들은 1970년에 대부분 파괴되게 된다. 공산당의 재교육 프로그램에 의해 그와 그의 아내는 떨어져서 시골에서 3년간의 중노동에 동원되어야 했다.
3년이 지나자 우관중에게는 겨우 일요일 혹은 공휴일에만 그림그리는 것이 허용되었고, 그 나머지는 들판으로 가서 일을 하도록 강제되었다.
이 당시 많은 화가들이 박해를 받고 있고, 심지어는 죽임을 당한다는 소문이 공공연히 퍼지게 되었다. 우관중은 자신의 누드그림들을 태워버려야 한다는 가슴아픈 결정을 하게 된다. 왜냐하면 누드그림은 공산당에 의해 비판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드그림을 소각한 이후 우관중은 신체적 박해는 피할 수 있었지만, 이는 두고두고 우관중에게는 아쉬운 일로 남았다.
1972년 우관중은 베이징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고, 여러 호텔의 벽화를 그리게 된다. 베이징으로 돌아오기 전에 우관중은 서구풍의 유화 혹은 수채화를 그렸지만, 대부분의 작가들은 여전히 전통 중국풍으로 수채화를 그리고 있었다.
여전히 중국 내부나 외부에서 사람들은 그림 하면 중국 전통의 먹그림을 염두에 두었다. 1975년 일본의 중국미술협회에서는 우관중에게 전시초청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 협회는 우관중에게 전통중국의 먹그림을 보여주기를 바랬다. 결국 우관중은 유럽적 재료를 포기하고 중국의 전통적 재료로 그림을 그리게 된다. 그럼에도 그의 전시는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1979년 우관중은 자신의 첫번째 개인전을 열었다. 이후 1980년부터 우관중은 화가로서 확고부동안 자리매김을 하게 된다. 이후 10회 이상의 개인전을 가졌으며, 1991년에는 프랑스문화성으로부터 문예훈장도 받게 된다.
2010년 6월 25일 밤에 우관중은 90세의 나이로 베이징에서 일생을 마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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